성철스님 - 이영주(32세, 전서공파)

     

성철스님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이씨 가문인 아버지 이상인씨와 어머니 강상봉씨 사이에서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의 부농이었고, 매사에 다망하여 굽힐줄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성철스님의 외고집과 당당함도 그의 부친을 빼다꽂았다고 한다. 그는 특히 명석하여 3세에 글자를 알고, 읽기 시작했으며, 5세때에는 시를 지을 만큼 뛰어났으므로, 인근 사람들은 신동의 출현에 칭송이 자자했다. 이미 10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읽고 모든 경서를 독파, 인근(隣近)에는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청소년기에 이르자 그의 두뇌는 더이상 낡은 세계에만 머물지않고 보다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당시 물밀듯이 들어오던 신학문과 철학과 종교등 제학문에 대해 지나치리 만큼 열정을 가지고 관심을 쏟았으나 모두가 참다운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자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지나가던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받아 읽고 지금까지 찾아헤메던 구도의 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후 참구도의 길은 수행정진에 있음을 알고 거사의 몸으로 입산, 불철주야 용맹정진, 승려이상의 진척을 보여 주위에서 출가를 권유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스스로 출가를 결심 모든 세속의 인연을 끊고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출가시를 짓고 승문(僧門)에 들었다.

이때 스님은 당시의 조혼풍습으로 일찍 장가를 들어 딸하나를 두었으나 정작 그 딸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했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톳불에 한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것 다 버리고 초연해 나홀로 걸어 가노라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동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수계득도 하였다. 이후 10년간 용맹정진을 단행하였는데 음식은 언제나 생식과 현미밥과 담식(談食)으로 일관했다. 의복은 24세에 만든 누더기를 일생 깁고 또 기워 입으셨다. 세속적인 모든것을 끊기위해 토굴주위에 가시철망을 쳤던 이야기며 신도들이나 친지가 찾아와 수행을 방해할까봐 오는 길목쪽으로 돌을 굴렸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등에서 스님의 수행정진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부단한 수행으로 인해 29세가 되던해에 동화서 금당선원에서 정진을 하던중 확연하게 일대사(一大事)인연을 요달(了達)하시고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셨다.

 

오도를 하신후에도 스님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행자의 삶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나이 일흔이 되실때까지도 손수 양말을 기워 신었으며 난방용 땔감도 그 양을 결코 지나치게 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한 삶은 한국불교의 전통과 수행가풍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훗날 교단정화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스님의 일생을 통하여 수도정진만 했지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절집의 事判으로 나서 본적은 한번도 없다. 1955년 해인사 주지직에 피선되었지만 주지직을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파계사 성전암으로 들어가 더욱 수도정진에만 전념했다. 이러한 삶은 조계종단의 종정이 되고도 그 추대식에 참석하지 않거나 국정자문회의 자리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사례를 통하여 잘 나타난다.

 

당시 자리싸움으로 박이 터지던 조계종의 잿밥싸움에 세속의 여론이 비등했던 풍토앞에서도 스님은 청산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음의 의미는 가히 수도자의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준업한 법문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교하방편은 특이해서 철저한 참선수행과 3천배로 일컬어지는 참회정진과 화엄경의 정화인 [보현행원품]에 들어있는 보현행자의 삶을 신도교화의 중심으로 삼았다. 스님은 조계종의 종조(宗祖)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한국불교의 법맥]이라는 저술을 남기셨다. 여기서 스님을 조계종의 법맥으로보나 선상사적 내용으로보나 보조지눌국사가 아니고, 태고보우스님의 법맥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 이론적 근거로 [돈우돈수]사상을 천명했다. 이러한 이론을 밝히기 위해 [돈오입요문론]을 저술하기도 했다.

 

큰스님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구에도 불구하시고 하루도 거르지않고 점심공양 이후 한참 졸리는 시간에 죽비를 들고 산방문을 확 열어적히시고는 졸고있는 선승들의 등줄기를 내려치면서 [이 도둑놈아 밥값 내 놓아라]는 소리를 쳐서 혼침과 산한을 제거해 주었다.

 

스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좌들에게 [참선 잘해라]하고 당부했다 하니 스님이야 말로 간소선의 순교자이셨다. 이제 스님은 가셨다. 지금쯤 어느 한편의 공간에서 한오리 향연으로 구름이 되고 연꽃으로 피어오르고 계시리라.

 

성철스님의 다비식

성철스님의 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