陜川李氏 二~九世 祭壇碑文

   경남 합천군 망월산

   시조 묘역에 건립된 2~9세 제단비

吾姓居陜川者自新羅敬順王朝而曆麗朝我朝至于至今則住居之歲千有餘載而鴻儒碩德鱗起文物之盛聞於國中之名門矣然羅麗之盛史有若杞宋之史文獻未徵又以麗朝及我朝鼎革之初未及有省墓之期失墓之家屈指難計吾姓其中之一而則烏可免哉伏惟吾李源流遡考古世譜東京誌曰吾始祖諱謁平號瓢巖先生降於瓢巖穴中屹立巖上自言其姓名身長九尺腰大拾圍河目海口龍顔方顙育中和之德爲閼川楊山村長當新羅開國有佐命功勳進拜太師太傅太宰太史諡曰文宣恩烈王詩曰有大德者其生也有自來其逝也有所爲故申呂自嶽降傅說爲列於箕星古今所傳不可誣也配聖烈王妃箕氏馬韓太祖大王諱準女太華公主有一男諱侑諡文和公配楊氏史勿國諱潘女始祖參拾九世孫諱開敬順王朝除玉堂翰林學士有艱世扶守國紀之功封江陽君吾李貫祖配慶州金氏敬順王傅第四子諱殷悅大安君侍中侍郞平章事女故兼儀賓都尉當羅麗之革守罔僕之節降爲陜州戶長拾八齒弱女訟父告身使父宥還復爵數百年後諡曰文忠公也子諱仁榮官三重大匡門下平章事千牛衛大將軍配安東權氏父戶長成奎女有三男長子諱敷無後系次子諱偉官校尉副正高麗成宗朝及第現麗史配潘南朴氏父仲達女生一男諱安悅官副戶長有五男長曰文奎官進士無後系次曰文球官驛丞生一男曰暉有學德行次曰文貫官舍人生一男曰仲明官易世官侍郞次曰文通官典理判事尙書省左僕射配牛峰李氏生三男長曰仲甫典客令公判事公典書公參派上系次曰仲庇官典書追封江陽君兵使公校理公詹事公牧使公四派上系次曰仲妣府使公派上系次曰文光官典校署典書生一男曰伯英官生員大司諫公直堤學公派上系季子諱惇官郞將生一男諱益瑞官陜州司戶侍郞生三男長曰存溫生二男曰仁甫孝友敦睦次曰仁庇官少監次曰存浚生一男曰承拔官軍器監次曰存淳官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翰林學士祕書省事載郡誌人物篇配郡夫人李氏生三男長曰義孫官密直副使朝奉大夫版圖判書一云贊成次曰信孫官參贊僉議府事一云門下府事尙書公派上系次曰德孫官僉議評理贊成事諡莊淑配三韓國夫人茂松庚氏參知公派上系也於噫甲管顧思先代九世間衣履之藏一無全失每歲時享之節無以供香焚之處苗裔之爲缺憾者久矣至是大宗會長漢洙中央宗親會長大鳳意合事業施行大宗會募金醵出中央宗親會各其分擔大宗會議數三次去處任員及宗議定結貫祖兆域下竪祭壇壇側樹碑陸拾四位合祭之所徵記之事以宗意囑昌燮義不辭盥手執筆溯考千載未遑之事兩會長各地域會長始而多少賢孝孫獻誠金此事推擧實行其孝心之篤不隨時勢而永久深思之誠心千萬分之可思爲子孫者當然之事也乃爲之詞曰  

仁德山南袤頭日月扶桑望月峯塽塏處屹立祭閣我先祖六拾四位合同奉事祭壇也齊浴盛服俎豆之薦酒香牲肥蘋蘩蠲潔升降禮行之儀至誠之致有秩有序井井有規精靈降臨歆饗于玆則向云子姓缺憾者始舒事祖獲福熾昌來裔萬世無窮也爲先之事何其不勖歟

                        

                            後孫大宗會顧問  昌燮 謹撰

         

 

陜川李氏 二~九世 祭壇碑文

우리 陜川李씨가 이곳에 거주한 것이 신라 경순왕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朝를 거쳐 오늘에 이르니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家門에서 德望 높은 巨儒와 賢人이 수없이 배출되어 名門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천년의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국난과 고려, 조선의 혁명적 建國 여파로 失墓한 家門이 많았으니, 우리 家門도 그중의 하나이다.

恭敬히 생각해 우리 李氏의 源流를 살펴보면 鼻祖는 諱 알평(謁平)으로 號는 瓢巖이시다, 瓢巖께서는 표암봉에 降生하셨으며, 체구가 장대하여 風采가 賢人君子의 氣像으로 中和의 德을 갖추어서 알천 陽山 촌장으로 추대되었다. 신라 개국 당시 좌명공신이 되어 太師太傅 太宰太史의 직명을 받았으며, 시호는 文宣 恩烈王이라 하였다.

 

詩傳에서 이르기를 큰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천명을 받아서 降生하므로 국가 흥망성쇠에 깊은 관계가 있으니, 申伯과 呂侯는 山神靈이 인간이 되어 降臨하였다고 하였고, 傅說은 죽어서 기미성(箕微星)별이 되었다고 하였다. 많은 역사가 이러한 전설에 의해 만들어졌음으로 우리 始祖의 탄생도 사실로 인정하는 바이다.

시조의 배위 은렬 왕비는 箕氏이니 마한의 太祖大王 준(準)의 따님 太華公主이시다.

우리 始祖 개(開)는 鼻祖로부터 三十九세손으로 신라 경순왕 때 玉堂翰林學士로 國亂에 國紀를 바로 세운 공으로 江陽君에 封해졌다. 배위 郡夫人은 경주김씨이니 경순왕의 넷째 아들 殷悅大安君 侍中侍郞 평장사의 따님이시다. 儀賓都尉 직을 겸하였으나 고려가 혁명으로 건국 할 때 굴복하지 아니한 관계로 陜州戶長으로 강등되었다가, 18세 따님이 부친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의 처벌을 받은 후 사면 복직되었고 후세에 文忠公 諡號를 받으셨다. 아들 諱 인영(仁榮)은 三重大匡 門下平章事 千牛衛大將軍을 지내셨고, 배위 안동권씨는 호장 성규(成奎)의 딸이다. 三男을 두었으니 장남 부(敷)는 덕행이 높았고, 둘째 위(偉)는 校尉副正을 지냈으며, 고려 성종 조에 급제하여 고려사적에 등재되어 있다. 배위는 반남박씨로 중달의 따님이다. 生一男 안열(安悅)은 副戶長을 지냈으며, 生五男하니 장남 문규(文奎)는 진사를 지냈고, 둘째 문구(文球)는 驛丞을 지냈다. 生一男은 휘(暉)이고 학문이 높은 선비였다. 生一男의 이름은 피달(避達)이며 덕망이 높았다. 안열의 셋째 문관(文貫)은 舍人을 지냈으며, 生一男 중명(仲明)은 易世官侍郞을 지냈다. 生一男의 이름 선(宣)은 正卽을 지냈다. 안열의 넷째 문통(文通)은 典理判事 尙書省左僕射이고 배위는 우봉李氏로 三男을 두었다. 장남 중보(仲甫)는 학행이 뛰어났고, 生一男하니 이름은 개(蓋)이며 驛丞을 지냈다. 生二男하니 장남 자성(自成)은 太保를 지내고, 生一男 적(績)은 正字를 지냈다. 차남 자광(自光)은 正卽을 지내고, 生一男 면(綿)은 副使를 지냈다. 문통의 차남 중비(仲庇)는 典書侍中 江陽君이며, 生一男 익(益)은 大相으로 江陽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배위 군부인은 星山李氏이며 左代 言瑀의 따님이시다. 生二男하니 장남 유간(惟幹)은 典書侍中을 지냈으며, 배위는 이씨이고 希叔의 따님이다. 生一男 우(祐)는 成均 祭酒였다. 익의 차남 유연(惟軟)은 侍中大護軍이며, 生三男하니 장남 약(若)은 司宰寺 江陽君이었고, 배위는 김씨이며 父는 太保이다. 繼配는 윤씨로 父는 直學이다. 차남 저(著)는 典書侍中이었고, 삼남 영(英)은 학행이 뛰어났다. 문통의 삼남 중비(仲妣)는 生二男하니 장남은 수동(秀東)이며, 德行이 있고, 生一男 영철(永哲)은 은덕이 높았다. 生一男인 순근(順根)은 선행이 남달랐다. 차남 계동(季東)은 마음이 천심으로 순박하였다. 안열의 다섯째 문광(文光)은 典校.典書를 지냈으며, 生一男 백영(伯英)은 生員이다. 生一男인 축(軸)은 密直承旨이다. 生一男 근(謹)은 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生二男하니 장남 광진(光瑨)은 尙書評理를 지내고, 차남 광함(光瑊)은 尙書左僕射를 지냈다. 인영의 셋째 돈(惇)은 郎將을 지냈으며, 生一男 익서(益瑞)는 陜州司戶侍郞을 지냈다. 生三男하니 장남 존온(存溫)은 친척간에 우애가 깊었고, 生二男하였으며, 장남 인보(仁甫)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다. 生一男 세화(世化)는 덕행이 높았고, 生一男 달충(達忠)은 성품이 순일하였다. 존온의 차남 인비(仁庇)는 少監을 지내고, 生一男 걸(傑)은 우애가 돈독하였고, 生一男인 윤분(允賁)은 학덕이 높았다. 익서의 둘째 존준(存浚)은 성품이 어질었으며, 生一男 승발(承拔)은 軍器監을 지냈다. 生二男하니 장남 양간(良幹)은 生員이고, 生二男 중 장남 영필(英弼)은 舍人이고, 둘째 종필(宗弼)은 生員이다. 차남 직간(直幹)은 同正을 지냈고, 生一男인 원필(元弼)은 학덕이 높았다. 익서의 셋째 존순(存淳)은 銀靑光祿大夫를 지냈고 군부인은 李氏이다. 生三男하니 장남 의손(義孫)은 密直副使이고, 차남 신손(信孫)은 參贊僉議府事를 지냈으며, 生一男 겸(謙)은 參贊을 지냈다. 生一男인 성(晟)은 門下侍中을 지냈고, 生一男 적(績)은 副使를 지냈다. 존순의 삼남 덕손(德孫)은 評理贊成事를 지냈고 시호는 莊淑이며 배위는 三韓國夫人 茂松 庚氏이다. 生一男인 설(偰)은 江陽伯을 지냈으며, 生一男 원분(元賁)은 中郞將을 지냈다. 生二男하니 장남은 양실(良實)이요, 차남은 양진(良眞)이다.  

 

공경히 생각건대, 先代 二世에서 九世까지 六拾四位의 묘소가 모두 失傳되어 매년 묘사 때가 되면 분향할 곳이 없어 많은 후손이 한탄 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대종화수회와 중앙종친회가 긴밀히 협의하여 제단과 제단비 건립을 추진키로 하고, 사업 계획과 시행은 대종화수회에서, 기금 모금은 중앙종친회에서 각각 분담하기로 하고 시작 하였다. 사업 추진을 위해 세 차례의 대종 회의에서 총의를 모아 망월산 시조 墓苑에 제단을 세워 六拾四位를 합동으로 제사하기로 하였으며, 종의로 祭壇碑文을 부탁하는지라 사양하지 못하고 두 손을 씻고 붓을 잡고 古事를 거슬러 추상해 보니 천년이 넘도록 하지 못한 일을 현세의 대종화수회 및 중앙종친회 임원과 각 지역 회장을 비롯한 많은 효손의 獻誠으로 이일을 실행하니 너무나 다행하고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합천 고을 인덕산 남쪽으로 뻗은 능선 峯에 해와 달을 바라보는 望月山 중턱 빼어난 明堂地! 그곳에 우뚝 선 제단은 우리 선조 六拾四位를 함께 추모하고 제사하는 제단이라!  정성으로 제사를 모실 적에 술은 향기 나고 안주는 살찐 魚肉이라 깨끗하고 정결하며, 차례와 法度를 준수해서 精靈이 강임하여 歆饗하시니 자손들의 恨이 비로소 사라지고, 또 선조를 섬겨 그 福을 받아 후손들이 번창하여 萬世에 다함이 없을 것이니, 선조를 받들어 섬기는 일에 어찌 그 정성과 힘을 다하지 아니 하리요.

 

西紀 二千十五년 九月 十 日

 

後孫 大宗花樹會 顧問 昌燮 謹撰.  後孫 大宗花樹會 副會長 銖憙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