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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이영기사무총장
ㆍ작성일 2019-11-05 (화)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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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서당 낙성사 편액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 유일 편액 詩 발견

「축 배산서당 낙성사」 편액

‘초대 부통령, 다시는 외세에 흔들리지 않을 나라 만들기 진력’
 
이 편액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길 16(사월리) 배양마을에 소재하는 합천 이문(陜川李門)의 배산서당 강당에 걸려있는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선생의 「축 배산서당 낙성사(祝 培山書堂 落成辭)」 편액이다.
 

배산서당(培山書堂)은 조선 중기의 남명 조식의 벗인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 1501~1568)과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1529~1619) 선생을 모시기 위하여 후손 진암 이병헌(眞庵 李炳憲, 1870~1940)의 발의로 1919년에 건립히였는데, 강당에는 당대의 중국 정치사상가 강유위(康有爲/ 캉유웨이 / 1858~1927)의 자필 편액과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 우천 조완구(藕泉 趙琬九, 1881~1954),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 1859~1925) 선생의 낙성 축문 편액이 함께 걸려있다.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 1869~1953) 선생은 백사 이항복(白紗 李恒福) 선생의 10대손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서 한말의 조선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 건국을 연결하는 맥(脈)을 이은 분이다. 우리 국가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위대한 영도자로 우리 겨레가 존경해야 할 어른이시다.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다시는 외세에 흔들리지 않을 나라를 만들기 위해 진력하였으며, 늘 두각을 드러내지 않는 이인자(二人者)로 사셨지만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과 의지로 아무리 자신과 가깝고 오랫동안 뜻을 함께하여 왔을지라도 자신의 생각과 철학이 같지 않으면 따르지 않았다. 따라서 누구도 선생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작은 거인이셨다.

또한 종인의 돈목과 선조의 유업계승(遺業繼承)을 위하여 1946년 3월 26일 경주이씨 중앙화수회를 창립하시었고 종친의 일을 자기 일처럼 앞장서 도왔던 분으로 알려져 있다.
 
 

▲성재 이시영 선생의 「축 배산서당 낙성사」 편액
 
[원문]
祝 培山書堂落成辭
축 배산서당 낙성사

聖道天大 過化存神(1) 包萬貫一 述舊開新
성도천대 과화존신     포만관일 술구개신

不入其門 執識其眞 値玆澆季 洪流無垠
불입기문 집식기진 치자요계 홍류무은

培山不孤 猗歟有隣 劈破積陋 龍門斧斤(2)
배산불고 의여유린 벽파적루 용문부근

繹緖尋源 日闢迷津 欣欣大同 羣物囿春
역서심원 일벽미진 흔흔대동 군물유춘

省齋 鷄林 李始榮 謹書

[국역]
성인의 도가 하늘 같이 큼에 지낸 곳 마다 변화하고 있는 곳마다 신통하도다.
만물을 포함하고 하나를 관통하여 옛것을 기술하고 새것을 열었도다.

그 문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그 참된 것을 알리요.
이 요박한 말세를 만나서 홍수가 끝이 없도다.

배산이 외롭지 않아 성대한 이웃이 있도다.
적루한 폐습을 벽파하니 용문의 도끼로다.

실 끝을 거사려 근원을 찾아서 날마다 아득한 나루를 열도다.
흔흔한 대동주의가 만물의 봄을 가두었도다.

(1) 과화존신(過化存神)은 맹자 진심장에 나온 문자인데 공자의 덕화가 신통함을 말함.
(2) 용문부근(龍門斧斤)은 예전 禹임금이 구년 홍수를 다스릴 때에 용문산을 끊어서 물을 빼어 낸 큰 도끼를 말함.
  

성재 이시영 선생 연보

[생졸년]  서울(1869.12. 3 ~1953. 4. 17)
[본관 및 자호]  본관 경주(慶州), 자 성흡(聖翕), 호 성재(省齋) · 시림산인 (始林山人). 김홍집의 사위.
[활동분야]  독립운동가, 교육가, 사상가, 정치가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1869년 : 12월 3일 한성부 저동에서 출생
1885년 :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 가주서(假注書/승정원의 正七品 벼슬)에 출사하다.
1887년 : 형조좌랑(刑曹佐郞/형조의 正六品) 역임
1888년 : 세자의 동궁에 서연관(書筵官/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으로 특
            별히 선발되어 4년 동안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 문과급제(고종 28년 증광문과 병과). 이어서 부승지(副承旨), 우승지(右
             承旨),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
             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 府事), 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
1894년 : 갑오경장 당시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의 딸(한살
             연상) 경주김씨와 혼인하다.
1895년 : 부인 경주김씨와 사별하다.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규봉(圭鳳)을 두다.
1896년 : 장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관직에서 사직하였다.
1905년 :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 되다.
1906년 :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가 되다. 
1908년 : 한성(漢城) 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
            임.
1910년 :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서간
            도로 망명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항일 독립군의 핵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 대첩
            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류하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
            習所/ 신흥 무관 학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민족 해방을 위한 청년장교
            육성 및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1911년 : 4월 중국 류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
            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1919년 : 3. 1 운동시 이동녕. 조완구 등과 함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
            고, 그해 4월 상하이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법무와 재무총장으로 활약하
            였다
1929년 :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다.
1933년 :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
            다.
1945년 : 8. 15광복과 더불어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7년 :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1949년에 이후 신흥전문
            학관(新興專門學館/초급대학)으로 발전시켜 1,2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한
            국전쟁으로 일시 정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 발전되었다
1951년 :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국정혼란과 사회
            부패상의 책임에 대한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을 사임하다.
1952년 :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다.
1953년 : 4월 17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병으로 운명.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
            에 안장하다.
1964년 : 묘소를 현 수유리로 이장하다.
1962년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 받다.

 
재훈 경주이씨중앙화수회 감사·종보편집위원
 
 
경주이씨종보 제336호(2019.10.25)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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